Tuesday, December 17, 2013

연세대 대자보의 클라스 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ㄷ

안녕, 합시다!

대학가에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습니다. ‘안녕들하십니까’ 라는 유령이. 새누리당과 국정원, 박근혜 대통령과 보수언론, 일간베스트저장소는 이 유령을 퇴치하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지만 유령은 계속하여 다양한 형태로 출몰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사회문제에 무관심했던 자신을 반성하거나, 관심이 있었더라도 표명하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하는 등, 그야말로 재 위에 앉아 옷을 찢는 회개의 행렬이 이어지는 실정입니다. 이와 더불어 최근 7천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을 직위해제한 코레일에 대한 규탄과, 권위주의적 행태를 보이는 정부에 대한 불같은 분노 역시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그 동안 안녕하지 못했던, 누구도 대표해주지 않았던 얼굴 없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 한국 현대사 역시 비극으로 시작되었고, 지금은 그것이 다시 희극으로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해서 딸이, 서북청년단에 대해 일간베스트저장소가, 1972년의 유신에 대해서는 국정원 사태가 바로 그러합니다. 그리고 공안정국으로 이루어진 정세 속에서 바로 그런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숭배는 박정희 전 대통령 개인에 대한 숭배의 열화 버전으로 서울에서 재현되고 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계속 공안 정국을 이끌어 나가게 된다면, 언젠가 국립 5.18 민주화 묘지는 한낱 역사적 희생양들의 공동묘지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무시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권위주의적 통치 스타일은 한국사회의 시계를 30년쯤 뒤로 돌린 듯 보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이후로 계속 자신과 똑같은 정통성을 부여받은 야당과도 성의 있는 대화나 합의를 시도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 있습니다. 정권 초부터 지속되고 있는 인사파동은 이러한 통치행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산적한 정치 현안들, 특히 국정원 선거개입과 같이 자신에게 불리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고장난 축음기처럼 아무 의미 없는 말만 반복하여, 시민들과 소통하려는 최소한의 성의조차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약과입니다. 박근혜 정권 이후 본격화된 공안통치와 종북몰이를 보면 이 나라가 정말 권위주의 시절로 돌아간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박 대통령이나 그 하수인들이 입만 열면 얘기하는 ‘자유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다원주의(Pluralism)를 그 기반으로 합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가 ‘3대 절대 자유’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곧 다원화된 사회라고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다원화된 사회에서 ‘국론 분열’은 당연한 일이고, 오히려 권장되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는 특정한 ‘국가관’이나 ‘안보관’따위를 가져야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특정한 국가관, 특정 사안에 대해 특정한 입장을 모든 시민이 공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야말로 자유민주주의와 거리가 먼, 전체주의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로 비판적 발언에 대해 ‘국론분열 용납하지 않겠다.’ ‘조국이 어디냐.’는 식의 대응으로 일관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그 하수인들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도 없는 ‘열린 사회의 적들’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이념을 동원해 시민들을 둘로 나누고, 그 절반의 지지에 기반하여 나라를 통치하려는 전략을 정치학에서는 ‘두 국민 전략(two nations strategy)’이라고 합니다. 두 국민 전략은 권위주의 정권들의 전형적 수법입니다. 이들은 시민 다수의 다양한 정치적 판단을 ‘우리편이냐, 아니냐’는 단순한 질문으로 환원시킴으로써 자유로운 정치적 사유를 위축시키는 자기 검열을 강화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종국적으로 민주주의의 기반인 자유로운 시민사회를 약화시킬 것입니다.

자신의, 그리고 곁에 있는 동료 시민들의 안녕하지 못함에 분노하고 변화를 촉구하는 일은 분명히 바람직한 일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겠다는 대통령은 국론 분열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전체주의적 엄포를 가증스럽게 늘어놓고 있지만, 우리의 다른 목소리야 말로 민주주의를 정상적으로 작동시키는 원동력입니다. 확신에 찬 하나의 의견만 있다면, 안녕한 자들의 목소리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지상의 독재국가 내지는 천상의 신정국가일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렇게나 안녕하지 못한 다른 목소리가 많다는 것은 죽은 반인반신이 다스리는 위대한 목적의 왕국을 거부하겠다는 살아있는 시민들의 민주적 의사 표명입니다.

하지만 함께 분노를 공유하는 것만으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요?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며 고백을 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과연 안녕해질 수 있을까요? 잠깐 이야기를 돌려 넬슨 만델라 남아공 전 대통령 이야기를 해 봅시다. 얼마 전 타계한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끔찍한 차별 속에서 안녕하지 못한 흑인들의 안녕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였던 인물입니다. 그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분노하고 이에 맞서 투쟁함으로써 ‘안녕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답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의를 실현한 의인으로 칭송받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현실은 전혀 정의롭지 못합니다. 여전히 많은 흑인들이 안녕하지 못하며, 빈곤과 궁핍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하나의 악을 척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흑인들을 지속적으로 안녕하지 못하게 만드는 불평등한 사회경제적 구조에 대해서는 손을 쓰지 못하였고, 자신의 동료들인 아프리카 민족회의에 대한 견제와 균형을 확립하지 않아 그들의 부패와 타락을 막지도 못하였습니다. 결국 말년의 만델라는 여전히 안녕하지 못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안녕을 가장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당하는 처지라는 평가에서부터 백인들로부터 평화의 사도로 인정받기 위해 흑인을 팔아먹었다는 비난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흑인을 아파르트헤이트에서 구원하고자 했던 만델라의 시도는 실패하여 결국 다음 세대의 과제로 남게 되었으며, 흑인들은 여전히 압제에 고통 받고 있습니다.

만델라의 실패 사례에서 알 수 있다시피, 지금 여기의 우리가 박근혜 대통령 내지는 새누리당, 국정원, 보수언론과 같은 암흑의 핵심만을 타도한다면 사람이 사람을 돕는 안녕한 세상이 올 것이라는 생각 역시 착각에 가깝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더 나아가 이명박 대통령이 없던 시절에도 대추리와 각지의 크레인과 굴뚝 위에는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언제나 존재하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과거의 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하였던 인물들 역시 모두의 안녕을 지켜주는 데에는 실패하였습니다. 우리는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기는 쉽지만,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와 같이 권위주의적 행태를 비판하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좋은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일은 더욱 풍부하고 심도 있는 참여와 논의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지난한 과정입니다. 이는 ‘안녕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답변하는 것보다 더욱 많은 고민을 필요로 하며, 악에 대한 순수한 분노 대신 타협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할 것을 요구합니다.

‘안녕하십니까?’ 라는 질문은 현재 우리가 좋지 못한 상황에 놓여있다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의미가 있는 자극제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단순히 집단적 고해성사와 박근혜 정부에 대한 미학적인 거부감을 표출하는 정념 발산에 그친다면 이는 힐링 열풍의 좌파적 버전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왜 안녕하지 못한지, 어떻게 해야 안녕해질 수 있는지 질문을 확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서로의 안녕을 물으며, 안녕하지 못한 현실과, 그 현실을 만든 대표자로 지목된 개인이나 집단에게 분노는 표출하는 일은 쉽고 통쾌합니다. 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은쟁반에 여왕의 목을 담아오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안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국 시민들을 안녕하게 만든 것은 찰스 1세의 목이 아니라, 전후 복지국가의 초석을 놓은 베버리지 리포트였습니다. 원수에게 도끼를 내려치는 통쾌한 일과, 통계와 씨름하며 보고서를 작성하는 재미없고 골치 아픈 일 중 어떤 일을 할지는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후자를 선택하는 것이 쉬운 일은 결코 아닙니다. 구약성서의 다윗왕은 좋은 통치를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왕인을 절멸시키고 원수를 자신의 손에 붙여줄 것을 더욱 자주 기도하였습니다. 그만큼 명쾌한 악을 설정하고 이를 통해 모든 사고의 책임을 말소시키며 분노만을 발산하는 것은 엄청난 유혹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적을 확인하고 타도하는 데에 몰두하기보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선의 실현을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히 적과 전쟁을 벌이며 피와 살육 속에서 지고의 쾌락을 느끼는 발할라의 광전사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안녕은 서로가 서로를 돕고 웃을 수 있는 행복한 삶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화두는 누군가에 대한 반대와 투쟁을 넘어, 좋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에 대한 논의로 넘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좋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에 대한 논의를 가로막는 생각들이 있습니다. 비단 정부 뿐 아니라 일각에서도 철도노조의 파업과 집회에 기성 정당들과 사회단체들이 참여하며, 연속된 자보에도 학생운동단체들이 참여한다는 이유로 순수성이 결여되었다는 비난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이는 정치는 순수하지 못하고 더러운 것이라는 반정치주의에 편승한 비난으로 명백히 민주주의와는 배치되는 주장입니다. 타협과 양보 혹은 갈등이라는 정치적 의사결정이 결여된 '순수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체제는 전체주의 체제밖에 없습니다. 순수함은 정치에서 결코 바람직한 가치가 아닙니다. 순수성을 주장하는 것은 타협과 양보를 요구하는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우회하여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자신의 목소리만이 정치에 반영되길 원하는 투정에 불과합니다.

어떤 정치적 주장에 대해 순수성을 원한다면 모든 정치과정을 부정하고 반민주주의 무장투쟁을 하거나 수도원에 홀로 들어가 참회록을 서술하며 고고한 삶을 살아가면 될 일입니다. 이들의 주장과 같이 수많은 '외부세력'의 참여를 부정한다면, 나의 행동이 타인의 의사에 의해 제한되는 집단적 의사결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정치학자 샤츠슈나이더가 지적했다시피 갈등은 민주주의의 엔진입니다. 나아가 민주주의는 혼종과 다양함을 그 본령으로 하며, 집단적 결정은 항상 타협과 양보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혼종과 다양성에서 나타나는 갈등을 사회적 목소리로 만들지 않는다면 이는 결국 사적 관계에서 힘을 가진 기득권자들의 승리만을 보장하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움직임들은 분명 고무적입니다. 하지만 섣부른 낙관주의 역시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확실한 구심점이 없는 거리의 정치는 그 유효기간이 짧습니다. 대의민주주의 정치체제 하에서 안정적으로 정치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조직된 목소리에 한정됩니다. 현재진행형 상태인 '대자보 운동'이 어떠한 경로로 귀결될 지 지금으로서는 예측할 수 있는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운동이 당장에 조직된 정치세력으로 결속되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기에는 여러 제약요인이 따를 것임이 분명합니다. '우리 모두의 안녕하지 못함'에 공감을 표했던 수많은 청년들 역시 저마다 다른 정치적 이상을 지향하고 있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때문에 우리 사회가 그들의 호소에 부응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아마도 보다 넓고 관용적이고 자유로운 정치적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 그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당장에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보다는 우선 청년들에게 정치적 삶을 되찾아주는 것이 우리 모두의 일차적인 책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신에게 악인이 흥하고 선인이 고통을 겪는 현실에 대한 의문을 표명하였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문호 푸쉬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고야 말리니.’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이 우리를 속이는 순간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이라고 생각하지만, 저희가 보기에 최소한 지금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렇게 불의에 대해 여러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이 모여 하나의 새로운 운동으로 조직 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이번 ‘안녕들하십니까’ 자보는 그러한 조직화의 시작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정국은 결코 안녕하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베버가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강조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표현은 더 가슴에 와 닿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안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안녕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안녕 합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 안녕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갑시다. 그러므로 저희도 역시 다시 한 번 강조하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세대학교 인문·사회과학회 목 하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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